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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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麻衣太子
신라의 태자
이름
미상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부친 경순왕
모친 죽방부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통일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태자(太子)이다.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후대에 김일(金鎰)이라고도 하나 명확하지 않다.

개요

사기에 따르면 935년(경순왕 9년) 10월 부왕 통일신라 제 56대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 세력에 눌려,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어 여러 신하와 함께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양도할 것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그의 동생들, 덕지왕자(김덕지) 및 이순유 등과 함께 불가함을 간언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말을 하였다. 또한 양도를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고려 태조에게 보내 입조를 요청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이에 태자(太子)는 통곡하며 김부대왕(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조상이 돌아가셨을때 입는 거친 마의를 입고 초식을 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일설에 금강산의 신선(神仙)이 되었다라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그의 문조(門祖)는 仙朝라 칭해진다)

그의 동생 덕지(德摯) 막내왕자도 처자식을 버리고 그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면서 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이름이 전하지 않는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간언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아서 처자식을 버리고 마의태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마의태자는 무리를 이끌고 금성(서라벌)을 떠났다.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고 한다.

그의 능은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 바로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돌로 변했다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그 비석에는 “新羅麻衣太子陵”(신라마의태자릉)이라 새겨져 있다. '신라마의태자릉'의 둘레는 약 10미터(m)이며 높이 1.5미터(m)이다.

후대 평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아버지 김부대왕(김부(金富) 경순왕)에게 맞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마의태자의 행동은 유교적 가치관에 비추어 끝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로 꼽혔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자수의 《상촌집》과 조선 중기 문인들인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 재조명되었는데, 오운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비롯해, 안정복(安鼎福)은 저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고려에 대해 별다른 협박이나 굴욕을 당한 것도 아닌데 항복했다"고 비판하며, "그나마 왕자가 아니었다면 천년 군자의 나라가 결국 남의 비웃음만 잔뜩 사고 말았을 것"이라고 마의태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오운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 왕자가 신라를 고려에 양국 하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열은 중국 촉한 멸망시 북지왕 유심과 더불어 일월의 빛을 다툴 만한데, 동방의 문헌에 이름이 전하지 않고 매몰된 것이 애석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전까지는 경순왕의 신라왕자로 표기되었으며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퍼지게 된 것은 일제시대 소설가 이광수가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東亞日報)』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 「마의태자」를 통해서였다. 이후 1937년 극작가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였다.

설화

  • 충주 미륵대원지 전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석굴사원 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자 개골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중 동생 김덕주 공주(또는 김덕지 왕자)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마의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마의태자 발자취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에는 마의 태자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

마의 태자와 그의 동생 덕지 왕자 및 덕주 공주가 각각 조성한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충청북도 제천 덕주사(德周寺)가 있다.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한 약 1,000년 된 수령의 천연기념물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으며, 강원도 홍천에서 마의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강원도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 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을 취재하였다. 굳이 서라벌(금성,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 착안하여, 서라벌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하였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선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마의태자의 개념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맏아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의태자와 함께 고려로 이양을 반대하며 신라 국권 회복 운동을 하였던 모든 형제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일은 3명(4명)의 아들을 두었고, 아들 가운데 김교는 통천군에 봉해졌으며, 형제는 김분을 비롯하여 당시에는 7명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은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라 묘비에 써있는 바, 김일을 마의태자로 볼 근거는 부족하다.

  • 통천 김씨 : 김일의 1남(또는 2남) 김교를 시조로 한다. 김교는 후에 통천군에 봉해졌다. 통천 김씨 세보에 경주, 개성, 부여, 부안등이 기록되어 있어, 세거지가 본관으로 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이를 고증할 문헌은 없다.
  • 경주 김씨 대장군공파 : 세보에는 김선웅, 김순웅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세거지는 김선웅은 경주이며, 김순웅은 평주였으나, 조선시대 때 경주로 옮겨졌다.
  • 청풍 김씨 :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정구의 17세손이 충청북도 제천 청성부원군에 봉해져 청풍을 본관으로,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한다. 마의태자의 후손으로서 고려말까지 조정에 등단하지 않았다.
  • 부안 김씨 : 부안 김씨의 시조는 마의태자라고 전하고 6세손 김춘(金春)은 부령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0세손 김구(金坵, 1211~1278)는 고려 평장사를 지냈다.
  • 부여 김씨 : 부여 김씨는 마의태자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데 고증할 문헌은 없다. 그러나 통천 김씨의 세거지에 부여가 기록되어 있어 통천 김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 부흥 운동설

신라가 멸망한 뒤 개골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마의 태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관련한 민간 전승과 묘, 유물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마의 태자는 여러 산들을 돌아다녔다.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신라 김부대왕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김부대왕동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김부대왕이란 경순왕을 의미한다.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이 비각을 「김부대왕각」이라 부르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김부대왕각 안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원래 「신라경순왕제일자지신위(新羅敬順王第一子之神位)」라고 경순왕의 첫째 아들의 신위라고 새겨져 있었으나, 1940년대 이후 후손들에 의해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로 이름을 추가하여 새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김은열 묘비의 전말이 밝혀지며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마의 태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고려에 정권을 이양했던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2]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일단 김부대왕인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神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순왕의 묘소는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강원도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3]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각 안에서 모시고 있는 위패처럼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를 가르킨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 김부대왕이 다녀갔을 가능성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기때문이다. 대왕각이 위치한 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마의 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이 발견 되었는데, 김부(金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仇의 집안이 길이 보전 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이 전하는 탑으로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의 비명이 확인되었는바, 여기서 말하는 김부(金富)가 실은 신라의 김부(혹은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경순왕 후손 비문 등장 관련

《김은열(殷說) 비문》 논란

1784년(정조 8) 경순왕이 분봉받은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김은열 비문》에 따르면 경순왕고려에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 왕씨 등을 맞이하여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 또 두번째 손 김굉(鍠)과 네번째 손 김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와의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어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적혀있다. 때문에 김일(鎰)은 마의태자가 아니라 고려 태조의 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경순왕의 이후 다른 아들들

이후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김은열 비문》을 추가하였다. 아들들 이름을 개명하고 작호(作號)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에 경순왕 아들들 이름 및 서차가 기록되기 시작하였으며, 마의태자 이름을 김일(金鎰)이라 단정하였다.

김은열 묘비의 이들은 경순왕의 후손인 경주 김씨로 볼 수 있으며, 경주 김씨에서 족보의 실전된 내용을 비문에서 보충한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히 취하여 할 조치이다.

그러나 경주 김씨 계보와 마의태자 후손의 계보를 잇는 김씨를 나누는 기준은 고려로의 이양에 가부 여부이다.

마의태자의 후손은 사군이충(事君以忠)의 화랑 정신을 지키고, 유교의 정신인 충절을 다한 것에서 의미를 찾고, 그 반대는 평화롭게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이양한 덕에서 의미를 찾으면 될 것이다. 실제 중국에서는 이렇게 나라를 평화롭게 이양한 요순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라며 태평성대라고 칭송한다.


금나라(金) 및 청(淸)나라 황실과의 연관성

함보(函普)는 금나라(金) 완안(完顏)씨의 시조이다.

김함보는 신라에서 태어나서 여진의 땅으로 가서, 완안씨(完顏函普)의 시조가 되었고 김함보(완안 함보)라 한다.

전주(全州)의 옛 이름은 완주(完)이다. 이는 지역내 완산(完山)에서 따온 것이다. '全'자는 '온전하다'는 의미와 '왕'이라는 뜻이며, 완주의 완(完)자도 역시 '온전하다', '완전하다'는 동일한 뜻이라고 한다. '완'자는 '왕'과 발음도 동일하다. 완안이란 '왕' 또는 '완의 얼굴'로 볼 수 있다. 완의 얼굴이란 것은 '완의 대표'라는 뜻으로 한국어 표현에서도 '자랑스러운 ㅇㅇ의 얼굴'이라는 식으로 그대로 쓰이고 있는 용례이다. 금태조 김함보는 마의태자보다는 김부대왕(경순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고려 기록에 나타나고 함보의 여진 발음상으로도 보이는데 물론 강원도 석릉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마의태자가 사람들이 잘 아는 김부대왕으로 알려졌을 가능성도 있긴하다.

경순왕의 후손 중 하나가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년)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라 일컫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려(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金의 시조이다’라고 한다.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였다.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았고 활라(活羅)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였다.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그러나 영가가 죽자 장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다. 오아속이 졸하매 오아속의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祖宗)이 대방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4]

이처럼 금나라(金) 태조는 신라인 김함보 (金函普)이다. 그의 후손 아골타가 대금(大金)이라 하며 나라를 세웠으니 그들이 금나라 황실의 주인공이었다.

통도사(通度寺) 청하 대종사를 은사로 하는 학봉당 준수 스님 주해 청나라 <순치황제 출가시>에 따르면 청나라만주족이 세운 나라이고 만주(Manchu)라는 말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산스크리트어인 '만주슈리(Manjusri)'에서 기원한 말이라 기록하고 있다.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인 중국 오대산은 사찰마다 청대의 황제들이 참배한 흔적이 곳곳에 전해지고 있으며 만주족의 조상은 여진족이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으로 세운 금나라의 황실은 신라인 김부(金富))대왕의 손인 김함보(金函普) 스님이 여진족 부족의 가장 귀한 딸과 결혼하여 여진족을 통일하고 규합한 이후, 그 후손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도 김함보 스님의 후손이라는 계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앞의 머리는 승려의 머리로 하고, 뒷머리는 속인 머리를 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왕위를 이양하며 대신 본인들은 석가모니의 석가족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남길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 기록은 황당하다는 식으로 거짓일 것이라고 주장한 기록과 같이 남아있다. 그러나 청나라 3대 세조인 <순치황제 출가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본래 나는 서방(서천축)의 스님 자손인데 어떤 인연으로 흘러 제왕가로 떨어지고 말았나'라고 한탄하고 있다.

 新羅王金姓相傳数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 - 금의 국호는 신라왕성을 취한것이다. 수십 세대에 걸쳐 전해내려오고 있다. -만주원류고
完顔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爲氏 - 완안 김시조는 신라에서 와서 완안부인위씨(颜部部因氏氏)로 삼았다 -만주원류고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女眞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 一爲熟女眞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顔年六十餘, 女眞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卽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侄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爲子. 其後楊哥生子闥辣, 乃令文烈歸宗. 여진의 왕은 신라인이며 완안씨이다. '완안'이란 한어로 '왕'「王」이란 의미이다. 여진은 연제하는 일로 인해 수령 자리를 양보하였다. 형제는 셋이며, 첫째는 잘 알려진 숙여진의 추장이며 만호로 불리었다. 그 하나는 다른 나라로 갔다. 완안년 60년이 더 지나고 그의 여진 부인도 60세가 되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장자를 '호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세 사람이 양씨 집안 태사에게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 아골타의 동생으로 '문열'이라고 시호를 보냈던 것이 아들이었다. 이후 양씨 집안은 아들을 낳았고 문열(아골타)에게 귀종(조상에게 귀의하라)하라 하였다. 금나라 주인의 9대조 이름은 감복(龕福)이며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시(追謚)되었고, 시조(始祖)라고 불리며, 배우자는 명의황후(明懿皇后)이다. - 송막기문(松漠紀聞)



마의태자가 등장한 작품

소설

  • 이광수, 「마의태자」(1930년)

희곡

  • 유치진, 「마의태자」

참고

각주

  1.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장자를 세칭 마의태자라 하고, 막내 아들은 승명이 범공이라 한다.
  2. [박성수교수의 역사 뒷이야기]
  3. 당시 경주에서 한강 유역까지 가는 길은 죽령을 통과하는 길(죽령길), 계립령을 통과하는 길(계립령길), 그리고 추풍령을 통과하는 길(추풍령길)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계립령길의 경우 문경과 충주를 지나 물길로는 남한강에서 양평을, 땅으로는 이천을 지나게 된다.
  4.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2006년 10월 25일. 2022년 10월 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